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라트 아데나워 (문단 편집) === 제3차 아데나워 내각(1957~1961)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CDU_Wahlkampfplakat_-_kaspl019.jpg]] ||'''Keine Experimente''' 실험은 안된다|| 8년의 국정 운영과 귀환 포로 출신 유권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제3차 아데나워 내각을 구성한 당시 그를 지배한 가장 큰 화두는 [[베를린]] 문제였다. '육지의 섬'이라고 불리면서 [[동독]] 영토의 한 가운데에 턱 박혀있는 서베를린으로 [[공산주의]]에 염증을 느낀 동독 시민들, 특히나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지식인 층의 탈출 행렬이 쉬지 않고 이어졌고 이는 동독 정권에게는 큰 골칫거리였다. 그러나 역으로 보자면, 서베를린의 존재는 서방에게도 뜨거운 감자였다. [[냉전]]시대 공산주의 세력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서방 진영이라는 그 상징성으로 인해 동구권의 무수한 위협을 감내해야 했던 것.[* [[흐루쇼프]]는 서베를린을 서방의 불알이라고 비유하며, 서방의 비명소리를 듣고 싶을 때 마다 서베를린을 움켜쥐면 된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자기 역시 베를린 시민이라고 한 것 또한 이런 상징성을 고려한 제스처였다.] 그리고 이런 점들을 노려 동독 공산당 서기장 [[발터 울브리히트]]와 소련의 [[흐루쇼프]]는 베를린을 서독과 동독이 나눠가지는 것이 아닌, 하나로 통합된 자유시로 지정하자고 제안하며, 그렇지 않다면 소련은 서독에서 베를린으로의 통행권 문제를 다루는 권한들을 동독에게 넘길 것이라고 위협을 했다. 흐루쇼프의 제안은 서방을 딜레마로 몰아넣었다. 베를린을 자유시로 지정하고 그들의 군사력을 철수시킨다면 동독과 소련이 서베를린을 호시탐탐 노릴 것이 불을 보듯 뻔하였다. 그렇다고, 이 제안을 거부하자면 앞으로 베를린으로의 통행권과 베를린의 유지에 관한 여러 요소들을 동독과 직접 교섭을 해야 했다. 이는 아데나워 외교 정책의 제1 원칙인 [[할슈타인 원칙]][* 동독과는 관계를 맺지 않으며, 소련을 제외하고 동독을 국가로 인정한 국가와도 관계를 맺지 않는 정책.]에도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었다. --결국 자존심 싸움-- 미국 정부는 자유시 제안을 거절하는 대신, 동독을 독자적인 협상 주체가 아니라 소련의 '대리인'으로 정의하고 동독과 협상을 하겠다고 아데나워 정부에게 통보했다. 하지만 안 그래도 베를린에 대해 매우 부정적 시각을 견지하던 아데나워는 미국의 제안도 단 칼에 거절했다. 동독과 교섭하는 그 순간, 미국과 단교하겠다는 것이 아데나워의 단호한 결의였다. 한편, 영국이 부랴부랴 자유시 문제를 둘러싼 소련과의 접촉을 진행하면서 시간 끌기에 성공, 1년 후 파리에서 이 문제를 전승국끼리 논의하자고 합의했다. 베를린 문제에 관한 그의 완고한 태도에서 보이듯이, 이 무렵의 아데나워는 자신의 신념과 국익 사이에서 혼란을 겪으며, 점점 자신이 한 평생 구사해온 예민하고 탁월한 정치적 조율 능력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베를린 문제에 관련해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는 그의 모습에서 미국과 영국 외교관계자들은 짜증을 느꼈다.[* 후일 발견된 당시 영국 외무장관의 일기에는 아데나워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이 가득했다. '반쯤 미친 늙은이'(...)이니 '의심만 많고 탐욕스러우며 공허한 양반'이니 등등.] 한편 이 시기 아데나워의 행보는 독일 내 정치계에서도 엄청난 문제를 일으켰다. 바로 다음 선거에서 연방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겠다는 선언을 한 것. 아데나워가 이런 판단을 내린 것에는, 그의 후임자로 거론되며 당 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던 경제부 장관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자신의 후임 총리로 임명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 깔려있었다. 당시 이미 80을 훌쩍 넘긴 아데나워의 나이 상, '총리직 그만 하시고 슬슬 물러나실 때도 된 거 같은데...'라는 게 독일 내의 주된 여론이었으며, 그보다도 더 본질적인 문제로는 '에르하르트의 총리직 수행 방해'라는 그의 대통령 출마 동기가 독일 연방 공화국의 헌법과 정면으로 대치된다는 것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대통령에 큰 권한을 줬다가 나치를 대두시키는 바람에 신생 독일 연방 공화국은 대통령의 힘을 대폭 약화시켜놓았고, 초대 대통령이었던 [[테오도어 호이스]]도 국무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등 철저히 비정치적인 행동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이거를 뒤집으려고 한 것이다. 게다가 아데나워가 그토록 집요하게 싫어하고 앞길을 막으려 했던 에르하르트는[* 에르하르트 본인도 도대체 아데나워가 자길 왜 이렇게 싫어하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라인강의 기적]]을 이끈 경제부 장관으로 당시까지만 해도 국민들에게 인기가 있던 정치인이었다. 결국 대통령 선거 출마 시도는 독일 내에서 '이 늙은이가 진짜로 노망이 들었구나...' 정도의 반응만 얻은 채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